눈 뜨고도 못 보는 코끼리, 만져야만 보이는 진실
전시장 벽에 걸린 정체불명의 형체들을 두고 작가는 '코끼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알던 거대한 동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보풀이 일어난 울의 질감, 모호한 곡선과 덩어리감만이 존재할 뿐이다. 보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이 작품들은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엄정순 작가의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시선'의 일부다.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보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은 오랜 우화인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전복시킨다. 일부만 만져보고 코끼리의 전체를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꼬집던 이야기는, 그의 작품 앞에서 오히려 모든 것을 본다고 믿는 '눈 뜬 자들의 오만'을 질타하는 비유로 탈바꿈한다. 시각적 관념에 갇혀 세상을 편협하게 인식하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장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철학은 1990년대부터 이어져 온 시각장애인과의 예술 프로젝트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맹학교 미술 교육 등을 통해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을 탐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보푸라기'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상징이 되었다. 반복된 접촉과 마찰로 생겨나는 우연한 잔여물처럼, 작품과 신체가 만나며 발생하는 새로운 감각의 흔적에 주목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무늬 없는 리듬' 연작이다. 이 작품은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50만 명의 관객이 직접 만지고 체험했던 촉각적 설치물 '코 없는 코끼리'에서 수거한 보푸라기를 재료로 만들어졌다. 수많은 사람의 체온과 접촉이 남긴 흔적이 시각 예술의 재료로 재탄생하며, 촉각적 경험이 시각 예술로 전환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1,000권이 넘는 점자책이 벽면을 가득 채운 설치 작업 '찰나 2001-1'도 눈길을 끈다. 바람에 따라 각기 다른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점자책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오직 시각에만 의존하지 않음을 웅변한다. 이는 시력을 잃은 노년에 국립도서관장이 된 보르헤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점자 아트북과도 맥을 같이한다.
엄정순의 이번 전시는 시각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다른 감각들을 일깨우는 도발적인 제안이다. 전시는 서울 학고재에서 오는 28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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